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내전 (문단 편집) ==== 옥타비아누스의 내전 ==== BC 32~ BC 30. 카이사르의 사후 후계자로 부상한 인물은 둘이 있었다. 하나는 유언장을 통하여 카이사르가 양자로 입적시킨 [[옥타비아누스]], 다른 하나는 카이사르 생전 내내 카이사르의 최측근이자 부사령관으로 활동한 [[안토니우스]]. 카이사르의 암살 직후 양측은 카이사르의 암살 세력을 타도하기 위해서 [[삼두정치]]라는 정치적 동맹을 결성했지만, 물밑에서는 서로를 견제하기 위한 치열한 암투가 연이어 일어난다. [[필리피 전투]]에서 카이사르 암살 세력을 궤멸한 이후, 양측은 로마 세력을 양분하여 옥타비아누스는 제국 서부를 안토니우스는 제국 동부를 담당하게 된다. 동부로 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서 [[클레오파트라]]와 사랑~~이라 쓰고 불륜이라 읽는다~~[* 당시 클레오파트라는 돌싱이었지만(남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로마군에게 살해, 14세는 요절했고 아들인 15세([[카이사리온]])과 공동통치 중이었다.)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옥타비아와 결혼한 유부남이었기 때문.]에 빠지게 되고, 연이어 거한 사고를 터뜨린다. [[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|파르티아 원정]]을 감행했다가 실패한 데 이어서, [[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|클레오파트라에게 로마 동부 영토 중 상당부분을 선물(...)해준다.]] 그것도 모자라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을 한 데 이어 아예 알렉산드리아에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자, 옥타비아누스가 장악한[* 사실 이 시점에서 안토니우스의 영향력은 아직 사라진 건 아니었고 딱히 옥타비아누스가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으나 옥타비아누스가 베스타 신전에 보관되어 있던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꺼내 공개하면서 로마에서 안토니우스의 지지세력 대부분이 옥타비아누스 편으로 돌아서게 되었고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던 자들은 도망쳐서 안토니우스에게 합류했다.]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다. [[악티움 해전]]을 통하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세력은 궤멸됐고, 두 사람이 자결하면서 이집트와 동방 영토는 옥타비아누스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.[* 이후 이집트는 황제 직할령으로 편입된다.]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가장 존엄한 자라는 뜻의 [[아우구스투스]]라는 경칭을 [[원로원]]으로부터 선사받고, 명목상으로는 로마 제1의 시민이라는 뜻의 프린켑스, 실질적으로는 황제가 되어 제정을 창시하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